『고려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1~2현북스, 2022 > 단행본 한국역사연구회


다이호 3년(703년)에 일본 조정은 고구려의 왕족이자 보장왕의 아들로 추정되는 고약광(고마노 잣코)에게 고마노고키시(高麗王)라는 가바네(姓)를 주었다. 또한 약광의 자손은 대대로 고마 신사의 궁사(宮司)를 맡아 오늘날까지 이어져 현대의 고마씨(高麗氏)가 되었다. 이후 연개소문은 대외 강경책을 펼쳐 648년 신라와 당나라가 연합하는 빌미를 제공하였다.


정확한 건조 연대는 알 수 없으나 고려 중기 후반경의 건축물로 추측된다. 이렇게 하여 팔만대장경 각성사업은 전 불교계는 물론, 국왕을 비롯한 전 계층이 참여하는 국가적 사업으로 진행되었다.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에서 1983년 만송문고본(晩松文庫本)을 축소, 영인하였다.


왕규는 당시 혜종에게도 후궁으로 자신의 딸 후광주원부인 왕씨(後廣州院夫人王氏)를 시집보내 태조와 혜종, 양인의 국구의 위치에 있었다. 이 때문에 광주원군 추대설은 후대에 왕제 요 때나 광종 때에 날조되었다는 의견도 있다. 왕규는 혜종에게 왕제인 왕요와 왕소(광종)가 제위를 노리는 것 같으니 유의하라는 고변을 하기도 했기에, 왕소와 왕요를 이간질하기 위해 자신의 딸 경화궁부인(慶化宮夫人)을 광종의 후궁으로 주기도 하였다. 왕권 다툼 속에서 혜종은 명확한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가 945년 병으로 죽었다. 943년 태조가 죽자 즉위하였으나, 이복동생인 왕요와 왕소가 왕위를 엿보았다. 그들은 태조의 제3비인 신명순성왕후 유씨의 소생이며 충주 지역 호족이었던 유긍달(劉兢達)의 외손으로, 충주 유씨는 혼인을 통해 여러 세력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전주에서는 절도사 조용겸이 현종을 납치하려다 위기를 겨우 모면하기도 하였다. 이 기간에는 고려 중앙정부는 실질적으로 와해된 상태였으며 각처의 장수들에 의해서 거란을 물리치게 된다. 당시 원나라에서 출세한 고려 사람 가운데 강융과 고용봉이라는 사람이 있었어요. 이들은 개성 근처에 원나라 황제의 복을 빌기 위해 원나라 탑 형식으로 탑을 만들었어요.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탑은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화강암으로 만들었어요.


그래서 사람을 시켜 성안에 있는 김돈중의 집에 가서 동정을 살피게 하였더니, 돌아온 흔적이 없다는 보고였다. 다행이다 싶어 바로 순검군을 이끌고 성안으로 들어가 “무릇 문신의 관을 쓴 자는 비록 서리일지라도 씨를 남기지 말라”고 외치게 하니, 군졸들이 벌떼같이 일어나 우리에게 호응하였다. 그 동안 무신들뿐만 아니라 군인들도 현 정부에 엄청난 불만을 갖고 있었던 것을 적절히 이용한 거지. 아직 얼마나 죽였는지 정확한 숫자는 보고받지 못했으나, 수백 명은 죽었을 것이다. 임금이 나에게 난을 진정시켜 달라고 애원했으나, 대꾸하지 않았다. 어차피 일어난 혁명(?), 혁명은 희생과 피를 요구하게 마련이지.


그 후 고려 왕실은 원 황실과의 결혼 정책을 취함으로써 왕권을 강화하려 했으며, 그 결과 고려에는 몽골의 풍속이 많이 들어왔다. 또한 제주도에는 몽골에 대한 항쟁을 계속하던 삼별초를 제거한 뒤 탐라총관부를 설치하고 목마장을 경영하였다. 13세기 초 중국 대륙의 정세는 급박하게 변화하고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600여 년 전, 중국에서는 몽고족이  세운 원나라가 쇠퇴하고 명나라가 중원의 패권을 잡는 대변동이 일어났다. 오랫동안 몽고족의 지배를 받아왔던 한족 농민들의 봉기가 치열하게 전개되었으며,  원나라 조정에서는 황제 자리를 둘러싼  권력투쟁이 거듭되고, 권신과  환관들이 발호하는 등  왕조의 말기적 현상이 두루 나타나고 있었다. 세월이 너무 흐른 지금에 와서 당시의 야만적인 행위에 대해 현재의 몽고 정부에게 배상을 요구하기는 좀 무리이다.


또한  합격한 후에도 곳곳에 있는  선배관료들의 지원을 받아 출세도 쉽게 할 수 있었다. 그만큼  좋은 학교출신이란 것이 명예롭고 중요시 여겨졌으므로, 이 학교출신들은 설립자인 최충의   호를 따서 문헌공의 무리라고 불렸다. 이러한 상황에서  충렬왕이 즉위하였는데, 그는  쿠빌라이의 딸과  결혼하여 원 황실의 부마가 되어 있었다. 이 점은 이후 두 나라의 외교  과정에서 큰 효력을 발휘하였다. 유목민족의 전통을  가지고 있던 원나라에서는 국가의  중대사를 쿠릴타이라고 하는 회의에서 결정하였는데, 부마도 왕자들과  나란히 참석할 수 있었다.


그밖에도 전쟁 중에 항복했던  사람들이 원나라의 위세를 업고 폐해를 일으키는 일이 많이 있었다. 예를 들어 몽고에 있으면서  고려의 어느 지역에서 어떤 특산물이 많이 생산된다 하고는 고려에 파견되어  토색질을 일삼거나, 이것을 빌미로 고려에서 관직을 얻기도 하였다. 몽고에서 배운  몽고어 실력을 앞세워 통역관으로서 두 나라  사이를 오가며 사실대로 전달하지  않고 자기 욕심을 채움으로써 국익을 훼손하는 경우도  있었다.


1385년 귀국 후 성균관 좨주(祭酒)와 지제교를 거쳐 86년 외보를 요청 남양부사(南陽府使)로 도임하여 선정을 베풀어 부민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다. 일찍부터 우리만의 기술로 배를 만들고 바닷길을 활용하고자 했던 선조들. 우리 해안의 지형과 특성을 잘 이해하고 있었던 선조들의 지혜가 옛 선박을 통해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습니다. 우리 선조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배를 만들어 강과 바다를 다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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